국악기 소개 2번째 포스팅으로 백악지장, 악기의 우두머리라고 불리었던 거문고 입니다. 거문고 연주를 들어보면서 거문고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
저번 포스팅에서 우리나라에 고유의 악기 2가지 중에 가야금을 소개해 드렸죠
오늘은 그 두가지중 한가지가 바로 '거문고' 입니다.
거문고는 6개의 명주실이 이어져 있으며 둘째 셋째 넷째 줄 아래 에 16개의 괘(프렛)가 고정되어있고 나머지 3줄은 안족으로 놓여져 있습니다. 거문고는 가야금과 달리 술대라고하는 대나무를 가지고 연주합니다 현악기지만 술대로 타악기적인 느낌을 내는 거문고만의 맛이 있는데 그 맛이 기가막히다고 하네요 ㅎ
거문고의 역사
거문고는 고구려의 대표적인 악기로
고구려의 재상 왕산악이 진나라로부터 선물받은 칠현금을 참고해서 만든 우리나라 고유 악기입니다.
옛날에 진나라 사람이 칠현금을 고구려에 보냈다. 고구려 사람이 그것이 악기인 줄은 알아도 그 소리와 연주법을 알지 못해, 나라 사람 중 능히 그 소리를 아는 사람을 후히 상주겠다고 하였다. 그때 제2상 왕산악이 그 모양은 그대로 두고 제원을 많이 뜯어고쳐 (새 악기를) 만들고, 겸하여 100여 곡을 지어 연주했다. 그러자 검은 두루미가 날아와 춤추었으므로 현학금(玄學琴)이라 하고, 뒤에 줄여 현금(검은고)이라 했다.1) 「악지」(樂志) ‘현금’(玄琴)
고구려의 거문고
거문고의 '거문'은 고구려를 뜻하는 설과,
검은학이 날아들었다 하여 '현학금'이라 불리다가 '검은(학)'고 ->거문고로 불린다는 설이 있습니다.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망하면서 '대금'과 함께 통일신라의 '천존고' 라고하는 보물창고에 보관되고 있다가
'옥보고' 라고하는 인물이 거문고를 가지고 지리산에 들어가 거문고를 독학하면서 알려지고 전수되기 시작했습니다.
고구려 거문고의 실물 유물은 없지만, 고분벽화에는 흔히 거문고나 그 원형악기가 등장합니다.
통일신라의 거문고
고구려의 거문고는 신라의 삼국통일과 함께 신라에 수용되고 한반도 전역에 퍼진 것으로 보는데요
『삼국사기』 「악지」는 ‘신라 옛 기록’을 인용하여, 거문고의 신라 수용과 정착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음악인으로 옥보고(玉寶高)와 신라인 귀금(貴金)을 언급합니다.
신라 사람 사찬 공영의 아들 옥보고가 지리산 운상원에 들어가, 금을 배운 지 50년에 손수 새 곡조 30곡을 지어 이를 속명득에게 전하고, 속명득은 이를 귀금선생에게 전했다. (귀금)선생 또한 지리산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신라 왕이 거문고의 도가 단절될까 두려워하여 이찬 윤흥더러 그 음악을 전할 수 있도록 하라 이르고 (윤흥에게) 남원의 공사를 맡겼다. 윤흥이 부임하여 총명한 소년 안장, 청장 2명을 골라 산중에 배알하고 배움을 전하게 하였다. (귀금)선생이 이들을 가르쳤으나, 그 은밀한 것은 전하지 않았다.
윤흥이 아내와 함께 (귀금에게) 나아가 말하기를, “우리 임금께서 나를 남원에 보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선생의 기예를 전하고자 함인데, 어언 3년에 선생께서 감추시고 전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내가 (돌아가) 복명할 길이 없습니다” 하고는, 윤흥은 술(병)을 받들고 아내는 잔을 잡아 무릎걸음으로 나아가 예와 정성을 다한 뒤에야 (귀금선생이) 감추었던 <표풍> 등 세 곡을 전하였다. 안장은 그 아들 극상과 극종에게 전하고, 극종은 일곱 곡을 지었다. 극종 이후 거문고로써 업을 삼는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악지」(樂志) ‘현금’(玄琴)
고려의 거문고
고려의 속악(俗樂: 향악鄕樂)은 삼국의 음악과 악기를 물려받았으므로 거문고도 비파(琵琶: 향비파), 가야금, 대금 · 중금 · 소금, 장구, 해금, 피리, 박 등과 함께 『고려사』(高麗史) 「악지」에 속악기로 소개되었습니다..
고려 고종(高宗, 1213~1259) 때 여러 문신들이 놀이 삼아 지었다는 「한림별곡」(翰林別曲) 중 한 절에는 거문고를 포함한 여러 악기를 벌여 놓고 밤이 새도록 노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지고 연주된 2개의 악기가 있으니 그중 하나가 가야금 입니다(다른 하나는 다음시간에!!)
삼국사기에보면 6세기경 가야국의 가실왕이 여러악기를 참고하여 만들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가야의 궁중악사였던 우륵에게 명하여 12곡이 작곡되어 연주되었는데 곧 나라가 망하고...
신라의 진흥왕이 우륵을 높이사 가야금이 신라로 전해지게 되었고 우륵의 제자인 계고, 법지, 만덕에 의해서 널리 전파보급되었다고 합니다
가야금 또한 (앞의 거문고와 마찬가지로) 당나라 악기 쟁을 본떠 만들었다. […] 신라 옛 기록에 일렀다. “가야국 가실왕이 당나라 악기를 보고 만들었다. 왕이 ‘나라마다 방언이 다른데, (음악의) 성음이 어찌 하나이리오?’ 하고, 악사 성열현 사람 우륵을 시켜 열두 곡을 짓게 했다. 뒤에 우륵이 그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지려 하자 악기를 들고 신라 진흥왕에게 투항했다. (진흥)왕이 그를 받아들여 국원(지금 충주)에 안치하고, 대내마(신라의 제10관등) 주지(또는 법지法知)와 계고, 대사(제12관등) 만덕을 보내 그 업을 잇게 했다. 세 사람이 열두 곡(원문의 ‘열한 곡’은 잘못)을 전수받고 서로 이르기를 ‘이것은 번잡하고 음란하여 아정하다 할 수 없다’ 하고는 줄여서 다섯 곡으로 하였다. 우륵이 처음에 듣고는 노하였으나, 그 다섯 가지 소리를 듣자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기를 ‘즐겁되 방종하지 아니하고, 슬프되 슬퍼하지 아니하니, 가히 바르다 하겠다! 이것을 왕 앞에 아뢰어라’ 하였다. 왕이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삼국사기』 권32, 「악지」(樂志)
가야금
가야금은 길고 넓적한 몸통(공명통) 위에 안족(雁足, 기러기발,movablefrets)이라는 열두 개의 줄받침을 올리고 그 위에 명주실을 꼬아 만든 열두 줄을 하나씩 음높이 순으로 얹은 현악기로, 각 줄을 오른손 손가락으로 뜯고 튕겨서 소리 냅니다.
이때 왼손은 안족의 왼편을 짚고 누르거나 떨어서 꺾는음(퇴성,退聲), 미는음(추성,推聲), 떠는음(요성,搖聲) 등을 가능하게 하는데, 이를 농현(弄絃)이라고 합니다.
전통적인 가야금은 크게 정악용과 민속악용으로 나누어지고, 20세기 중반부터는 다양한 방식의 개량가야금이 나오고 있는데 그중 일부는 표준 가야금으로 정착되었습니다.
가야금의 종류
정악 가야금
풍류 가야금이라고도 불리며 예로부터 전해지는 형태를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12줄의 명주실로 이어져 있으며 비교적 몸체가 크고 줄도 굵어서 더 낮은음을 냅니다.
궁중음악(여민락, 영상회상등)에서만 연주되기 때문에 일반적이지 않고 가격도 비쌉니다.
주로 가야금 전공자들이 가지고 있는 악기입니다.
산조 가야금
정악가야금에서 개량되어진악기로 좀더 작고 가벼우며 줄간격이 좁아 연주하기 쉽게 만들어졌습니다.
산조(독주)와 민속악 연주의 용도로 악기로현재 일반인들에게 널리 보급되어 연주되고 있는 악기 입니다
개량된 산조가야금의 형태는 민간에서 수백 년 전부터 사용되었을 것이나
김창조(1856 ~ 1919) 명인에 의해 처음 산조(散調)가 연주되기 시작하면서19세기후반부터 산조가야금이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개량 가야금
20세기 이후에 여러 작곡가, 제작자 연주자에의해 13현, 15현, 17현 등등 여러 개량된 악기가 많고 현재도 실험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많이 사용되는 개량가야금은 25현 가야금으로 현재 작곡되고있는 창작곡이나 퓨전국악에 가장 많이 쓰이는 악기입니다.
줄이 많은만큼 크고 무거우며 넓은 음역대를 연주할 수 있습니다.
가야금을 전공하는 분들은 이렇게 3가지 악기를 보통 가지고 있습니다
가야금의 구조
마치며
가야금이 한국 고유의 악기라는 사실 아셨나요??
올려드린 가야금산조 음악은 어떠셨을지 궁금하네요.
앞으로 국악기부터 시작해서 하나씩 국악에 대해서 소개하겠습니다.
국악이 좀더 대중들과 가까워지기를 바라며 포스팅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p.s 국악 컨텐츠는 네이버 지식백과를 주로 참조하여 작성합니다.
p.s 기원과 역사에 대해서는 문헌을 보고 추측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가지 설들이 많이 있습니다.